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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그리운 이복순 누나를 그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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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36회 작성일 25-11-01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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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그리운 이복순 누나를 그리면서
글: 김영승 (비전향장기수)
[민족통신 편집실]

이복순누나는 1930년 보성군 회천면에서 출생했다.
광주사범 손영심누나와 동기생이다.
이복순누나는 합법 때 전남도당 당증과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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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28일 일시적 후퇴를 했을 때는 입산하여 화순 백아산에서 전남도당 부위원장인 동시에 전남도 빨찌산 총사령관인 김선우 동지의 기요원으로 일했다.
1951년 여름부터 지리산 파송이 시작되었는데 야산에 있으면 적들의 침공작전에 다 희생되기 때문에 지리산 파송을 시작하였다.
이복순 누나는 51년 가을에 지리산으로 옮기었다. 지리산 부대에서 투쟁하다가 적들의 대대적인 토벌공세에 52년초에 체포되어 7년 형을 받고 감옥생활 하다가 출옥했다.
출옥 후 결혼하여 아들 둘 딸 둘 4남매를 낳아 대학까지 가르켜 큰아들은 치과원장을 서울에서 하고 있다.
사위는 강원도에서 한의사를 하고 있다.
광주에 살고 있을 때 알게 되었다.
백운산에서 1954년 4월 5일에 적들과 마지막 싸우다가 김선우위원장이 자결로서 희생되자 서남경찰 대 사령관은 비록 적이지만 인품이 훌융하고 많은 인민대중들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시신을 백운산 원능선에 묻으라고 지시하여 생포된 우리 동지들의 어깨에 매고 지금의 6.15고지에 묻혔다.
희생된지 수십년이 흘러가는 세월 속에 고 윤기남선생과 이복순누나의 일가견에 의한 수번 답사하여 시신을 찾았다.
그 시신이 묻혔던 고지, 백운산 상봉이 보이는 능선고지를 6.15고지라고 필자가 명명했다.
그후 선산에 옮기느냐 마는가 하는 문제를 김선우 위원장 동생이 살아 있는데 김결이라고 한다.
결국 선산에 옮기기로 하여 오늘날 까지 묘가 선산에 있다.
묘소 벌초는 윤병구 동지가 한다.
이복순누나는 매년 4월5일 기일 때는 제찬을 준비하여 모든 경비는 자기가 다 내며 최대의 성의를 다 하였다.
이 과정에서 선우산악회가 조직되어 이복순누나와 같이 제사를 올릴 뿐만이 아니라 2003년 4월에 제1차 전국 빨찌산 추모제가 2003년 4월에 백운산 한재에서 지낼 때도 경비는 다 부담할 정도로 성의를 다하였다.
나이가 90대에 접어들자 강원도에 사는 딸네 집에서 살다가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서 드디어 95세로 일생을 마감하였다.
전국묘소 답사반이 강원도 오대산 빨찌산 전적지를 갔을 때인 10월 23일 11시에 마지막 살아 생전에 한번 면회 할려고 신청했는데 면회가 안된다고 하여 그냥 돌아왔다.
10월25일 전북 순창에서 빨찌산 혁명열사추모제 때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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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이복순 누나이시어!
누나의 일생은 미제의 반공 식민지 80년 체제에서 미제를 몰아내고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투쟁에 올 곧게 사는 일생이었음이 전남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이복순 누나는 뿐만 아니라 노래도 꾀꼬리 목청으로 잘 불러 인기가 대단했다.
인간은 하루를 살더라도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후대들에게 고매한 인품과 실천적 활동에 대를 이어 교훈이 될 것이니 이제 모든 아픈 시름을 다 잊으시고 반미 자주통일 전선의 길 위해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장지는 강원도 강능에 묻는다고 한다.
유족들애게도 어머니의 참뜻을 잊지 마시고 건강하게 사시기 바라면서 위로를 드립니다.
빈소는 4일장이라 28일 마치고 강능으로 간다.

2025년 10월 28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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